top of page
Search

Karl Barth(1886-1968) & Arnold Schönberg (1874-1951) & ME

Wayne WanSoo Chai

February 28- frpm FaceBook

Shared with Public


누구는 펜데믹에도 *어떻하든, 무엇이든* Cogito, Ergo sum 생각한다 고로 나다


나는 누가 잘한 일을 보고 선뜻 추종하는 성격은 못된다. 하지만 20세기 신학자 Karl Barth가 나 보다 먼저 태어나, 물리적 시기로 선점하고 "세상은 여전히 어둡고, 고통에 차 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부활하셨다.”라고, 1968년 죽기 하루 직전 날에 (당시 나는 국민학교 6학년/좀 일찍 독일 사람으로 태어날 걸) 그의 유언 같은 말이 오늘 나 에게는 큰 힘이 되는 날이다.


*이에 대한 생각 이입 1.


지금 우리 세상도 코비드-19 우한 발 펜데믹으로 여기 저기 Lockdown 되고, 각 나라의 사악한 어둠의 무법 통치자들과 그들의 수하 airhead들에 의해 보통 삶의 보편적 질서마저 가로 막혀 고통들을 받고 있다. 그리고 Karl 의 어둡고 고통에 찬 때는 반세기가 지나도 여전히 그대로이다.


하지만 이러한 세상을 지울 수는 없지만 오늘도 부활하신 주님의 경륜은 이 절대 절명의 아우성들 한 복판을 머뭇 거리지 않고 그대로 가로 지르며 큰 강물처럼 도도히 흐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급 물살에도 주님은 긍휼의 큰 배를 띄우시고 금방 부서져 버릴것 같은 우리 인생들을 그의 안전한 구조선으로 승선을 독려 하실 것으로 믿는다. 이는 전에 물의 심판 때를 떠 올리면 가능하다.


*좀더 나간 생각 이입 2.


Karl Barth(1886-1968)가 자유주의 신학의 환경적 기반시대로 부터 다시 구 전통의 정통주의는 아닌것이 neo-orthodoxy/신 정통주의 신학이라 하며 진화 한것과 관련 이와 유사 할수 있는 유럽 고전 음악 분야에서는 같은 세대로 할 Arnold Schönberg (1874-1951)가 있다.


그는 독일 현대 음악 작곡가로 근대주의 작곡가 Wilhelm Richard Wagner의 (1813-1883) 급진적으로 방황 돌진해 나가는 전조 (Tonality Modulation) 와 프랑스 작곡가의 Claude-Achille Debussy (1862-1918) 그리스적 원시적 병행 4th & 5th 의 화성구조(Paralleled Homophonic), 투영법등으로 부터 더 탈선하여 무조성Non Tonality 12 음열로 하여 신학의 자유/신 이성주의 처럼 급진적으로 진화할 사조로 했다.


하지만 Arnold음악도 시간 / 공간적 소리 진동 배율 / 구조/ 설계등 창조론의 수리적 질서 앞에서 그의 의도는 갈길을 잃고 방황을 하고 만다. 그러나 한날 뒤를 돌아 보는 순간 그는 바로크의 신 왕조 시대 독일 작곡가 원류로 박물관에나 있어야 할 Johann Sebastian Bach(1685-1750) 의 고전을 기억해 내고 300여년전 바로크 시대 유행한 Polyphonic 푸가 전통Fugue의 잠재된 작곡 기법으로 회기하고 이를 그의 논리적 구조 형식에 응용한다.


이에 Arnold 도 신학자 Karl Bart 가 되먹지 못하고, 버르장 머리 없는 자유 신학에서 돌아서고 나서야 나름 신 정통주의를 찿고 위와 같은 기특한 명 유언도 남긴 것 같이, 그도 정통의 사고관 격인 그레고리안부터 근대까지를 뒤 엎어 버리는 것을 신계몽/이성주의로 알고 대들었지만 정작 현대 음악의 새 이디엄/논리/이론의 자유는 구 전통 바하의 기본에서 가능한것을 안 이후에야 그때까지 인류가 들어보지 못한 20세기 낯선 소리/새 음악/ 20세기를 반영한 전적 사상적 변환의 Ars Nova/신 예술을 찿을수 있었다.



그런데 그의 신 음악을 조력한 Bach 의 음악이론/작곡 기법 composition application 이라는 것도 매 세기,매 세대마다 그러기는 하지만, 이성/계몽주의라 하는 신세대 극진 진보라 자칭하는 머리에 피도 안마른 어린것들이 유독 그렇게들 증오하는 세계사로 한 미제/동,서 유럽 배경의 중세/암흑기 안에 Gregorian Chant 원천을 음악의 역사적/미학 Modal 그 근간을 이론으로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세대를 같이했던 신학자 칼바르트와 작곡가 쉔베르크의 유사점을 보면 이성/계몽을 위해 전통속에 잠재해 있었던 전통으로 신 전통으로 하고 그들의 길을 찿았다 할수 있다.


하지만 나는 두사람 다 반 만 좋아한다. 왜냐하면 신학과 예술론에서 그들은 각자의 하나의 온전한 완성으로 지향 했겠지만 실제는 반만 이루었고 남은 반은 전적으로 인정하기는 한계와 논란이 수반될 뿐 만 아니라 실제의 원형을 뒤틀어 강제로 한 부분이 상당하기 때문에 선호에 따른 관심을 끌수는 있으나 거대한 원형의 무게를 다 든다 할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두에게 다 유익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비교적 부분으로 본 다면 칼 신학은 아놀드 음악 혁신의 강도에는턱에도 못 따라 가기는 한다. 하지만 근접한 사고관의 방식은 거의 같다.


추가적 확장된 이입 3.


문화적 배경 시대에 서로한 이들의 일부만 소개 한다면, 헤겔과 베에토벤 / 니체와 바그너 / 플라톤과 아리스토 텔레스의 미학 / 엘레트라 (살로메)의 오스카 와일드 또는 쇼펜 하우어 그리고 또 작곡가 리하르트 스트라우스 / 프랑스 작곡가 뒤뷔시와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 인상파 화가 모네, 르노와르, 휘슬러들이 서로했다.


또한1897 년 홍난파를 시조로 1956 년 까지 시대로 한 주요 작곡가들의 “한국 가곡사”(1989년 과학사) 안에 1941-1956 년 생 중 오직 유일하게 1인 으로 선정된 한국계 작곡가 채완수가 있다.


그의 지난 여정들에는 궁켈이 분류한 다윗의 찬양 시편은 물론이고 그의 작품 탄생에 동행을 [해준 "견고한 고독"의 기독교 문학 시인 김현승, 청록파의 시조인 시인 조지훈, “한국적인 한의 정서를 조국에 대한 애정으로 승화시킨(인용)” 시인 정완영, 승려로 일제 독립 운동가이고 시인 한용운, 80년 광주 사태를 위한 진혼의 승려 시인 박진관, 6. 25 전쟁 전 한국의 괴수 김일성이 러시아 노래를 듣기 위해 자주 초청된 북한 출신의 바쿠스 말술의 신으로 쓸쓸한 호령만 치던 바리톤 한 노장 성악가, 홍길동 만화작가 신동우의 친 형으로 그것을 영화화 하기도 한 입에 아예 파이프 궐련을 달고 산 애연가 회화적 만화가 신동헌, 현대 신학자 Karl과 작곡가Arnold 와 한 시대안에 북한에 빌 붙었지만 루이제 린저가 극찬한 한국계 유렵 현대 음악의 최거장 작곡가 윤이상(1917년 생) 을 첫 데뷔시킨 음악 평론가 김점덕, 캐롤 위머, 까뮈의 이중성과 삶의 분노를 그리기로 시작 미술 자존심의 나라 프랑스 파리시와 파리 현대미술재단(FMAC) 등에 그림들을 걸어놓은 최고 한국계 재불 고 화백, 전통 문화재 탈춤 전수자 무용가, 베네딕토 수도원 김 수사, 80년대 군부에 의한 해직 조 총장과 해직 칸트/헤겔 철학과 교수들, 또 신학자들과 한 페어로] 서로 다르지만 주절이 주절이 위에 열거한 그들과 한 군락을 이루고 군집 되어왔다.


(3IS 채 교수: 4개 음과 음열로 구성 작곡)


이들은 그들의 무슨 환각이나 영감이 아닌 서로의 논리 접근 가능한 이해의 사상과 철학과 시상과 악상과 화상을 서로 마주한 유기적인것 으로 하여, 세속적이든 신성한 것이든지 융합적 신정통적 정통을 시도하려 했다. 이러한 이후에나 최후의 정점인 기독교적인 영성도 논할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창조주 섭리의 비밀은 우리에게는 지극히 한정적이고 그의 수리적 질서는 무한하고 너무 신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시대는 어떠한가, 세계 2차 대전 종전과 함께 더 이상 명작 탄생은 없고 전에 걸작품 종들의 masterpieces specie 대 멸종들만 이어져 가고 있고 섣부른 실용 프로그램들만 판을 치는 희극적 저렴한 Virtual비극의 시대이다. 그것도 BigTech에나 숭배하고 그것들에 노예 인지도 모르고 말이다.


펜데믹은 펜데믹 대로 제 갈길 가라 하고 내 갈길은 내 대로 가야 한다. 오늘의 인물로 거론한 신학자 칼과 작곡가 아놀드도 넘어서야 한다. 그들이 한것 처럼 구습에 꽁꽁 숨어있는 신 보석을 두져 보기라도 해야 한다. 무슨 비판 받을 주제라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펜데믹에는 더 바쁜 삶으로 살아내야 한다.


우리 주님은 부활하셨다.


3IS 담당 지도교수 채완수, 2021년 2월 28일 새벽 1시 10분 리치몬드 힐 에서

2 views0 comments
Post: Blog2_Post
bottom of page